우주의 바깥을 향하여 떠도는 방

                                        < 사적 시공간의 발견 >을 마주하며


오 승 은 ( 소 설 가 )     
가벽 너머로
 어물쩍 가을로 들어서던 시월의 어느 날이었다. 사람들 옷은 두꺼워졌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심 속에서는 가을을 맞이할 새 없었다. 그러나 낙동강가로 나서자 모든 것이 짙어져 있었다. 나뭇잎과 구름과 곤충의 울음과 그늘이. 모든 것이 기울어져 있었다. 갈대와 해와 옷깃과 그림자가. 한 주 전만 해도 가을 기운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없었다. 옷감도 스타일도 걸음도 기분도 여름 언저리에 걸쳐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월이라는 단어에서 주는 차분하면서도 아득한 분위기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풀의 색과 벌레의 움직임과 바람의 냄새 속에는 어떤 변화를 감지하는 속삭임이 있었다. 예리한 도시 생활자에게만 관측되는 사이의 계절, 혹은 발견의 계절인 셈이다. 그건 사적이면서도 소소한 계절의 발견이자 한 세계의 발견이기도 하다.동료 예술가들의 전시나 공연을 볼 기회가 많이 없었다. 게으른 탓도 있고, 장르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가벽을 쳤던 탓이기도 하다. 한때 나는 이 가벽(fake wall)이라는 단어에 매혹된 적 있었다. 벽이면 벽이지, 가짜 벽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 뜻과 어울리게도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이 가벽이라는 단어에서는 얼마든지 허물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연약함이 감지된다. 그러므로 타인을 경계하며 세워둔 가벽은 장비 없이도 단박에 허물어뜨릴 수 있을 딱 그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짜 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책상에 보이지 않는 금을 그어두고 넘어오지 마라며 으름장을 놓는 아이의 진지함처럼 그것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가벽을 이용한 공연이라는 이야기가 나를 끌어당겼다. 마음이 닫힌 이가 넘기 힘든 바로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방 문턱이듯 나는 단 한 발을 내밀었을 뿐이었고, 세계는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온 듯했다. 한 세계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사적 시공간’을, 아니 비로소 나의 사적 시공간을 발견하고 싶었다.
유령의 세계로
삼락생태공원 삼락오토캠핑장의 잔디광장에 설치된 가벽은 네 면이 온통 백(白)인 임시 구조물이다. 구조물은 정육면체를 닮아 보이지만 아래는 잔디고, 위는 하늘이기에 온전한 여섯 개의 면이 아니다. 그러므로 화이트 큐브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오히려 큐브의 바깥이니 안과는 다른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안으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도저한 세계에 대한 도전, 혹은 바깥으로의 밀려남인 듯하여 호기로우면서도 동시에 애처롭다. 안과 밖의 분리는 천이다. 얼마든지 찢어발길 수 있고, 구부러뜨릴 수 있고, 납작하게 접어버리거나, 불태워버릴 수도 있는 천일 뿐이다. 그러나 이보다 견고한 천이 또 어디에 있을까. 당신이 호기심에 손가락으로 꾹 눌러버린다면 순백의 천이 덥석 물고 안으로 데려갈 만큼 깊숙한 천이다.
바닥은 땅으로 닫혀 있다. 천장은 어둠으로 슬래브를 쳤으나, 실은 열린 공간, 혹은 차마 닫지 못한 공간으로 보인다. 흰 천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은 구조물의 심지로 보이지만 비가 내리면 언제든 허물어질 테다. 그러므로 이 공간은 태생적으로 불안하다.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땅은 카펫으로 하늘은 천으로 닫아 만든 유목민의 게르(Ger)는 현대의 텐트로 발전한다. 같은 천으로 이뤄졌음에도 캠핑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땅과 하늘을 막지 않은 건 이 구조물이 유일하다. 바람에 펄럭이는 텐트에서 노을을 보기 위해 고개를 빼든 사람들이 몇몇 있다. 그러나 이 가벽에는 누구도 드나들지 않는다. 오로지 바람만이 제 집이다 싶어 들어갔다가 다시 새로운 바람에 밀려나는 행색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텐트라 부를 수 없겠다. 게르라고 할 수도 없다. 노마드적인 가능성을 가졌음에도 잠깐의 정착도 온전하지가 않다. 모름지기 노마드란 일시적으로라도 정주해야만 한다. 그래야지 밤사이 짐승 무리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한 가벽이여. 그런데 구조물이 자꾸 눈길을 이끈다. 좀체 무엇을 할지도 짐작하지 못하겠는데 말이다. 사위는 어두워져 이제 흰 천에 검은빛이 스민다. 기실 검은빛이란 없다. 빛이 빠져야지만 체감되는 마이너스의 색이 바로 흑일 터인데, 천에는 자꾸 검은빛이 비치고 있는 듯하다. 슬며시 내려앉는 밤의 치맛자락인가, 서늘하게 밀려오는 강의 입김인가. 이내 완전히 어두워질 듯도 하지만, 검은빛은 도도하게 품위를 유지한다. 비록 가벽이라 해도 네 면은 완전히 이어져 영원처럼 서로를 끌어안는다. 달은 구름 뒤에서 이울어져가고 있다.
 바로 그때, 텐트 하나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분명 조막만 한 텐트인데, 마법의 텐트라도 되는 양 끊임없이 바깥으로 나오는 중이다. 열심히도 나온다. 뭔가 재미난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아이들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다. 몸을 움직이자 현란한 빛이 쏟아진다. 아이들이 텐트에서 서둘러 나오고 싶었던 것처럼, 빛도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황홀한 빛은 줄넘기가 되었다가, 부메랑이 되었다가, 요술봉이 되었다가, 씽씽이가 되기도 한다. 한 공간 안에 섞여들 수 있는 빛이 아니다. 자석의 극처럼 서로 밀어내고 있다. 그 가운데에 내가 있다. 왼쪽으로는 검은빛이, 오른편에는 형광의 빛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다. 이 빛의 뻗어나감으로 두 눈이 아뜩해진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방향을 잃어버린다. 어쩌면, 어쩌면. 이쪽에서, 아니 저쪽에서의 나는 유령이다. 길을 잃은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있다. 누구도 찾아볼 수 없게, 완전히 사적인 시공간 속으로.
즉은 즉, 흥은 흥으로
 연주가 먼저 시작된 것인가. 영상이 이미 가벽에 물들고 있었던 것인가. 무용수의 발걸음이, 또 한 명의 무용수의 호흡이 공연을 이끌고 있었던 것인가. 동시에 시작되는 건 없었다. 어떤 관객은 머나먼 하늘 저 너머에서 으스러지고만 태양의 무늬를 가까스로 찾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향해 달려드는 선명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게 바로 시작이었다. 큐 사인이나 입맞춤이나 신호나 설명은 없었다. 이건 나와 세계의 첫 만남, 곧 태어남의 순간과 일치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콘트라베이스의 낮은 울림이 땅거미처럼 서서히 지상의 끝으로 밀려날 때, 천으로 된 가벽 기둥으로 그림자가 생성된다. 거친 듯하지만 기호학적으로 직조된 그것은 어쩌면 천이 간직하고 있던 씨실과 날실이다. 직물의 평평함은 각으로 휘어져 다시 평평함으로 다시 각으로, 다시 평평함으로 각으로, 평평함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빛을 내뿜는 빔프로젝터의 마법은 공간적 한계를 가지기에 결코 너머를 엿보지 않는다. 이를 채우듯 두 무용수가 잔디 위로 스며든다. 스며든다고 해야 하는 속도다. 노을이 물 위에 스미듯, 그늘이 풀 위에 스미듯, 서서히 그들은 적셔 든다. 두 사람이지만 그, 라는 단수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아 있다. 그림자와 그림자처럼 원본에서 떨어져 나온 이 쌍둥이들은 콘트라베이스의 두 현처럼 평행이나 각기 다른 음을 지녔다. 그들은 결코 하나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해체가 사랑이라는 걸, 세상의 방향이라는 걸 속도로 알아차릴 수 있다. 가벽의 불안함이 사람이 되어 움직인다. 손끝이 몽롱하고, 발끝은 멜랑꼴리하다. 이 우울질의 물질은 흑에서 나온다. 땅에서 나온다. 땅에서 하늘이 되지 못하고 머문다. 이들은 유령이다. 콘트라베이스의 음파가 내어둔 유령일 수도 있고, 직물이 혼을 껴안은 유령인지도 모른다. 다만 이들은 서둘러 움직이지 않고, 섣불리 사라질 마음도 없다. 그들은 여전히 스며들며, 이 공간을 흡수한다. 하얀 네 면은 어쩌면 블랙홀처럼 세상을 빨아들이고 있다. 하나둘 텐트 바깥으로 고개를 내미는 사람들이 보인다. 무엇을 하나. 무엇을 저리도 하고 있나. 질문은 질문으로 이어지고, 세상은 모호하게도 짙어져간다.
 여태 음악은 밤이 내어주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무심하게도 소리를 꺼뜨리지 않았다. 콘트라베이스는 사람의 몸이자 또 하나의 분신이다. 말하는 유령. 주어진 목소리로 세계를 설명해낸다. 그것은 음정보다는 감정을 가졌다. 지하의 하데스에게 아내의 새 생명을 요청하고자 하는 오르페우스의 연주처럼 스산하지만 간절한 구석이 있다.
세상은 다시 이리로
어느새 땅 밑은 겨울의 것이 되어 있고, 차가운 기운이 무릎 위로 차오르고 있다. 나는 옷깃을 여미며 이 계절이 벌써 다 지나간 건 아닌지 묻고 있다. 차가움은 각성제처럼 시선을 매섭게 만든다. 나는 그들이 이제 분리된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영상과 음악과 몸짓과 또 다른 몸의 선은 바로 이 시공간에 있는 것이고, 거기에는 나도 있다. 텐트 안에서 머리를 빼꼼히 내민 관객이 보는 건 무엇인가. 광활한 광장에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을, 그걸 보는 사람을 보고 있다. 이는 세상을 넘어선 세상, 비로소 가장 사적인 시공간이 된다. 불완전한 구조물은 음악과 무용의 즉흥에 의해 견고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세계로 갈마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영 그곳에 닿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가야 할 곳은 등 뒤의 세계, 텐트도 풀숲도, 강가도 아닌 오직 내 방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곳은 우주이자 동시에 하얀 네 개의 면으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세계, 작고 여리지만 가장 사적인 나의 방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구에 의해 자전과 공존의 에너지를 쓰고 있다. 지구는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테지만, 나는 내 방 안에서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 저 너머는 우주의 바깥. 끝 간데 없는 끝, 도달하지 못할 마음의 바깥. 그곳에 사람이 있고, 나는 그 세계가 그리웠다는 걸 감각한다. 그리고 그 감각이 그리웠다는 걸 체감한다. 여기에 ‘사적 시공간의 발견’이라는 한 세계가 있다. 나와 닮았고,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듯 다르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 이리로, 이리로 온다. 내게로, 다시 내게로. 바닥과 위가 열린 하얀 상자를 통과하여.
 당신은, 당신은 어떠한가요. 바깥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요. 우주의 바깥, 거기에 무엇이 있다 해도 당신이 조금 덜 외롭고 그러하기를 바랍니다.